하천

[고지도] 광진구 및 성동구 일대 목장지도 & 50년대 지도

노블롯 2022. 12. 15. 05:38

왜 하천에 집착하게 되었나.. 하는 이야기를 아직 마무리하지 못했지만 재밌는 자료가 있기에 잊어버리기 전에 올려봅니다.

출처: 위키백과 목장지도 항목

복개된 하천의 흔적을 찾아보는 데 있어서 지적도의 구거 흔적, 행정정보 공개 서비스로 제공되는 과거 항공사진과 더불어 중요한 자료가 바로 고지도입니다. 서울시에 본격적인 도시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인 1970년대 이전 고지도는 하천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경우가 많기에 하천의 흔적을 되돌아 보는 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집니다. 과거 항공사진의 경우 1970년 이후의 자료가 대부분이기에 그 이전의 고지도는 과거 지형을 살펴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지금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광진구, 성동구, 중랑구 일대는 과거에는 서울이 아닌 경기도 고양주면이었고 1949년에야 성동구로 편입되었기에 조선시대 성저십리 지도에는 다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저희 동네를 그린 지도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663년 사복시 제조 허목이 작성한 목장지도의 진헌마정색도에 광진구 일대가 아주 자세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성동구, 광진구, 동대문구, 중랑구 일대가 예전에 어승마 (임금이 타는 말)을 기르는 살곶이 목장이었고, 그 흔적이 마장동, 자양동(자마장 -> 자양으로 변화), 모진동 (수렁에 빠져 죽은 말을 건져먹어서 모질다는 뜻) 등 지역 이름에 남아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나타나 있을줄은 몰랐습니다.

조금 더 친절한 사진

과거 서울 동부 지형이 한강의 잦은 범람으로 인해 많이 바뀐 것으로 알았는데 실제 고지도를 확인하니 전반적으로 지금의 서울 동부 지형과 크게 다름이 없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물론 사진에서 생략된 부분 (잠실도와 송파강, 광나루 등)은 지금의 모습과 많이 다르겠지만 살곶이 다리와 자양동, 성수동 일대의 지형 모습은 강변북로 제방 축조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다른 모습이 없는 것 같습니다.

현재의 광진구 및 성동구 일대의 모습

비록 청계천이 현 지도보다 훨씬 상류 부분에서 합류하긴 하지만 살곶이 다리의 위치와 중랑천이 꺾이는 부분을 생각해 보았을 때 과거 광진구와 성수동 (뚝섬) 일대의 지형과 유사한 모습이 보입니다. 현 성수동과 자양동 일대는 1970년대에 한강 직강화 공사를 하면서 제방을 쌓아 마련한 땅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과거와 지형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지도상 뚝섬이 표시된 것도 재밌는 부분입니다. 한강이 범람되어서 뚝섬이 생기는 모습까지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비가 내리면 중랑천의 유로가 바뀌어 현 서울숲 지역이 섬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말들이 많이 유실되었을 것인데,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쌓고자 노력했지만 당시 축조 기술상 쉽지 않았을 것이었고 실제로도 실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위키백과)
지도에서 눈에 띄는 모습은 옛 광진구 지역의 하천과 호수의 모습입니다.

화양정 근처의 모습

화양정 근처에 택지와 우물이 존재하는데, 화양정이 현 건국대학교 부지 인근에 위치했던 것과 모진동 (동네 여인들이 수렁에 빠져 죽은 말을 건져 그 고기를 먹었다는 설화에서 유래)이라는 지명을 고려해봤을 때 저 지도에 표시된 택지는 현재 일감호의 바탕이 된 수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동구다리 전설 (http://www.gwangjin.com/1504)에 등장하는 현 어린이대공원 정문 근처 연못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디지털광진 ≫ 능동 옛이야기 2-동구다리 전설

마을을 염려하는 술 받아 주는 귀신 이야기 능동은 안정된 주택가가 모여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만해도 약 300여가구정도가 촌

www.gwangjin.com

(윗 링크 참조)

중곡동 인근의 모습

한편 현 중곡동 또는 중랑구 경계 근처에는 여기연이라는 연못과 언포 (둑 또는 방죽 언堰 자를 쓰고 있습니다)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이 부분 또한 흥미롭습니다. 아마 언포는 지도상 답십리의 위치와 비교했을 때 아차산과 용마산의 경계인 긴고랑에 해당하는 하천이 아니었을까 사료됩니다. 다만 시점이 아차산이 아닌 뜬금없는 연못인 점은 의문이긴 합니다. 또 여기호 (또는 여기연)이라는 연못의 위치도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중랑문화원의 구비설화에 따르면 (https://ncms.nculture.org/traditional-stories/story/5991) 일제강점기 무렵까지 면목2동 인근에 큰 연못이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해당 연못이 여기연이 아니었을까 추측됩니다. 지도상 그려진 위치를 보았을 때 나름 타당한 모습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된다면 긴고랑천보다 더 규모가 큰 면목천이 지형도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미스터리긴 합니다.

면목동 여기연(女妓淵)의 이무기

면목동에 큰 연못(어기연)이 있었다. 그 큰 연못에는 큰 구렁이가 살았다. 구렁이는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려고 했던 구렁이인데, 암놈 구렁이에게 빠져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있다

ncms.nculture.org

(자세한 설화는 윗 링크 참조)
한편 진헌마정색도와 비교하기에 좋은 현대 고지도가 있는데 바로 1957년 <서울특별시(SEOUL SEPCIAL CITY)지도>입니다. 서울 역사아카이브에서 제공하는 설명에 따르면, 이 지도는 육군본부공병감실의 지시에 의해 1901공병기지측지부대에서 간행한 1:12,500으로 작성한 지형도로 국내 기술로 제작된 가장 앞선 지도이며,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http://museum.seoul.go.kr/archive/NR_index.do)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 동부지역 일부 발췌

그 중에서도 서울 동부 지역을 나타낸 지도 일부를 보면 진헌마정색도에서 표기된 언포와 여기연이 대략적으로 어디인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비설화에 따르면 면목천과 중랑천 합류점 바로 북쪽에 여기연이 위치해 있었을 것이나 일제시대 즈음하여 매립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므로 해당 지도가 작성될 무렵에는 이미 사라졌을 것입니다. 다만 지도 동북쪽 부분 60이라고 표기된 곳을 흐르는 하천이 면목천인데, 특이하게도 흐름이 상당히 구불구불하고 주변에 구하도의 흔적으로 보이는 연못들이 보입니다. 이에 따라 여기연의 위치를 고려했을 때 아마 면목천의 구하도 (舊河道, 자유곡류하천의 흐름이 바뀌며 만들어지는 우각호 등이 이에 해당)가 여기연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면목천도 여기연의 일부로 여겨져 지도에서 표기되지 않았다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설화에서 여기연의 이무기와 엮이는 구리시의 장자못도 왕숙천의 구하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묘한 부분입니다.